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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세번째

by 역사잘이 2024. 3. 3.

일본의 역사 세번째 시작합니다.

일본의 역사 세번째

 

아스카 시대

6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는 야마토 조정의 본부가 주로 아스카에 있었기 때문에 아스카 시대로 불렸습니다. 6세기 후반에는 조정의 국내 지배가 안정되었고, 오히려 조정 내에서 계승을 위한 큰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불교는 백제로부터 유입되어 이후 아스카 문화, 백봉 문화 등 불교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서적이 유입되면서 이 무렵 문자의 사용이 널리 퍼졌습니다. 6세기 말 4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등장은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권력 집중화를 불러왔습니다.

 

7세기

7세기 전반에는 스이코 천황과 조카인 우마야도 친왕세자가 소가노 우마코를 견제하면서 왕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수나라에 첫 사신이 파견된 후 17조 헌법을 도입하는 등의 정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권력가의 저항이 거셌기에 이후에도 권력 집중화 시도는 계속되었으나 움직임은 주춤했습니다. 수나라에 두 번째 사신이 파견된 데에는 오노 미나코가 파견되어 중국 현종에게 친서를 건넸습니다. 친서에는 '부상국의 황제에서 석양국의 황제로'라고 적혀 있는데 비록 조공 외교의 틀 안에 속했지만 중국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인 군주임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자율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습니다. 7세기 중반의 다이카개혁은 권력집중화 움직임의 하나로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집중화의 가장 큰 계기는 7세기 후반 백제부흥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의 여러 세력이 국가체제 발전을 도모하기로 합의하면서 권력집중화가 급속히 시작되었습니다. 나아가 진신전쟁에서 승리한 덴무 천황은 권력을 집중시키며 천황을 신격화했습니다. 천황의 이름은 덴무시대에 제정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율령제의 도입

동시에 천황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율령제의 도입이 추진되었고, 8세기 초에는 타이호 율령의 제정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일본의 이름도 타이호 율령 제정 전후에 제정되어 후지와라에 미야코성이 설치되면서 태호의 이름을 따 연호가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덴무 천황의 칙령을 근거로 하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료인 『일본서기』가 편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홋카이도 중남부와 아오모리현 북부에서 사쓰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라시대

8세기 초부터 말까지 나라 시대라고 불렸고 나라에 도성(헤이조교)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다 리쓰료 국가 체제의 형성과 심화를 위해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왕도민 사상에 입각한 리쓰료 체제는 천황과 관료들의 중앙집권적 통제를 목적으로 했고, 문을 뜨개질하는 제도, 논을 논으로 하는 제도, 조세 조정의 제도 등에 의해 백성들을 통제했습니다. 8세기 전반에는 리쓰료 체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산세이 이침포법이나 간다 영생의 사금융법과 같은 농경지 확대 정책도 이 체제에 속했다고 추측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쇼무 천황 치하에 주구 막부가 설치되는 등 정치적 중심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8세기 후반에는 농민층의 분화가 시작되고 도주 증가로 인한 세수 감소로 리쓰료 통치의 변화가 불가피해졌습니다. 복원된 대극궁 나아가 신라를 외국으로, 도호쿠 지방의 에조와 미나미큐슈의 하야토를 외국인으로 보는 중국인들의 의식이 높아지자 일본은 신라에 공물을 요구하며 에조와 하야토를 리츠료 통치로 '교육'하려 했습니다. 이때 북방영토는 일본해 쪽의 근거지로 남았고, 영토 확장에 나선 일본은 항복한 에조를 우대하고 군사력으로 이들을 통제하는 양면정책을 취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가뭄, 기근, 산불 등 재난과 전염병이 빈번했습니다. 특히 735년에서 737년 사이에 발생한 천연두 전염병으로 귀족이나 서민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이러한 재난이 자신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던 쇼무 천황은 불교에 대한 헌신을 더욱 깊게 하고, 도다이지의 창건을 명함으로써 전국적인 불교 진흥을 도모했습니다. 문화면에서는 '니혼쇼키', '만요슈', '후도키' 등이 편찬됐고, 중국 사절단이 불러온 대륙 문화의 영향을 받은 텐표 문화가 융성했습니다. 불교는 정부의 통제를 받았지만, 국가 수호 사상이 강해졌고, 쇼무 천황의 요청으로 국가 수호를 명분으로 도다이지와 고쿠분지가 세워졌습니다. 쇼토쿠 천황이 만든 100만 개의 탑에 놓여진 1인 1탑 다라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라고 합니다.

 

헤이안시대

8세기 말부터 12세기 말까지 헤이안 시대로 불렸고, 수도는 간무 천황이 건설한 헤이안교였습니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고펀 시대 지방 수령에서 비롯된 고대 구니즈쿠리 가문이 임명한 군지 계급이 붕괴되고 농민 계급이 더욱 분열되면서 율령 국가 체제에 한계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11세기 초경부터 조정은 분권 국가 체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왕조 국가 체제라는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왕조국가에서는 대규모의 주권을 위임받은 황실과 그 고쿠가 조직에 의해 지방통치가 전개되었습니다. 이 통치하에서 징수제도는 토지단위의 과세와 영향력 있는 농민이나 토착민인 구니지 자녀 등 부자들에게 토지관리를 맡기는 것이 결합된 네거티브 명의제도로 전환되었습니다. 도청의 군제를 통해 무과의 가족으로 공식 인정된 무사계급은 쇼헤이 덴케이의 난이나 침략 등 국내외 군사적 위기를 해결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또한 11세기에는 후지와라 북방 가문이 천황가의 친족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섭정이 확립되었습니다. 12세기에 들어 왕조국가가 바뀌면서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걸쳐 장원의 양적 증가와 장원의 자치적인 1엔 영토화가 두드러졌습니다. 동시에 하늘의 지배자로서 상부 황제에 의해 정부 업무를 담당했던 인세이가 시작되어 이 시기는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 후기

헤이안 시대 후기에 사무라이의 군사력은 호겐과 헤이지의 난을 거치면서 중앙정치의 정쟁 결과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이세히라 일족에 의해 타이라 일족 정부는 본래의 사무라이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나라 시대부터 서서히 진행된 문화의 일본화는 한자를 바탕으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사용하는 결과를 낳았고 서사문학이 성행했습니다. 밀교와 수호사상이 널리 전파되었고 신도와 불교의 혼합주의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습니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11세기경 아베씨, 기요하라씨, 오슈후지와라씨 등 반독립적인 정부가 흥망성쇠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친주후 쇼군과 함께 자주 싸웠습니다. 서남도서에서는 12세기경부터 구스쿠 시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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